이금룡 K글로벌타임스 발행인/(사)도전과나눔 이사장 (사진 = K글로벌타임스)
이금룡 K글로벌타임스 발행인/(사)도전과나눔 이사장. (사진 = K글로벌타임스)

[K글로벌타임스] 지난 10월 25일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사망 2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이재용 부회장과 사장단 등 약 300여 명이 이건희 회장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다. 발행인은 삼성그룹에서 22년간 근무하였고 이건희 회장 시절 비서실에서 4년 이상 근무하면서 이건희 회장을 존경해 왔다.

지난 8월 열린 발행인이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도전나눔 44회 기업가정신 포럼에서는 개혁 군주 정조대왕을 다뤘다. 군주로서의 정조 대왕 업적과 기업가로서의 삼성 그룹 이건희 회장의 업적이 너무나도 일치하여 본 칼럼에서 정조대왕의 치적과 이건희 회장의 경영 업적을 비교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 첫째,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후계자 시절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 세자가 정조대왕 11세 때, 뒤주에서 사망하고 1762년 세손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실제 1776년 22대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14년간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노론의 세력을 이겨내고 왕위에 오른다.

이건희 회장도 친형인 이맹희, 이창희에 이어 3남으로서 후계자가 되기까지 힘든 길을 걸었다. 1973년에 후계자로 내정되고 1979년 공식적인 후계자가 된 뒤에도 1987년 12월 회장직에 오르기까지 순탄하지 않았다.

◇ 둘째, 호학의 정신으로 무장한 대학자로서의 면모

정조대왕은 익히 알려진 대로 5~6세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엄청난 독서량을 보였고, 세자 시절 서연을 통하여 역사와 동서고금의 학문을 접하여 조선시대 최고의 학식을 가진 군주로 칭송받고 있다. 군주로서는 유일하게 왕의 문집인 홍재전서를 펴냈다.

이건희 회장도 유학시절 3년간 영화 1,300편을 섭렵할 정도로 엄청난 호기심으로 지식을 습득하였고 특히 후계자 시절 장인인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으로부터 18년간 매일 저녁에 교육을 받았다고 전한다. 1993년 6월 신경영 당시 원고 없이 350시간을 강연하여 그 지식과 생각의 폭에 모두 경탄할 정도로 엄청난 지식을 보유한 기업가였다.

◇ 셋째, 시대의 변화를 읽고 온 몸으로 개혁을 실천하다

정조대왕과 이건희 회장은 당시 상황에 위기의식을 절감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추어 개혁을 실천하였다. 정조대왕은 등극하자마자 과감한 탕평책으로 남인과 소론 출신을 등용하고 조선 건국이래 시행되었던 서얼 차별을 금지하는 서얼허통벌을 제정하여 서자의 관직 입문의 길을 열었다.

인재 확보를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고 예산의 56%에 해당하는 군제를 개혁하였다. 또 일부 상인에게만 상업의 독점권을 주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누구나 상업을 허용하는 신해통공을 발표하였다. 노비를 추적하는 노비추쇄관 제도도 폐지하였다.

이건희 회장도 1993년 삼성그룹의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절대절명의 승부수인 신경영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언한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는 구호에서 나타나듯 삼성의 신경영 드라이브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양에서 질로 변화하여 초일류기업을 만들자’며 온몸을 던져 개혁을 단행한 오늘날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故 이건희 삼성전자 전 회장. (사진=삼성전자 제공)<br>
故 이건희 삼성전자 전 회장. (사진=삼성전자 제공)

◇ 넷째, 인재를 기르고 중용을 하다

정조대왕과 이건희 회장은 인재의 중요성을 깨닫고 폭넓게 인재를 기르고 중용하였다. 정조대왕은 노론의 지배하에 남인 출신 체재공을 영의정으로 발탁하였으며 규장각을 설치하여 초계문신과 검서관 제도를 시행하여 정약용과 같은 젊은 인재를 발탁하고 서얼출신인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을 중용하였다.

이건희 회장도 국내 기업가로서는 가장 인재의 중요성을 역설한 분으로 ‘한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강조하고 S급 인재의 스카우트를 지시하였다. 약 1조를 투자하여 국제화를 위한 해외지역 전문가 6,000명 이상을 양성하였다. 공채 시, 학력을 철폐하고 여성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우수 인재 영입과 교육에 총력을 기울였다.

◇ 다섯째, 어려운 이들을 돌보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다

정조대왕은 국민들이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다각적인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구휼에 힘을 써왔는데 그제도가 1783년에 마련된 ‘자율전칙’이라는 제도이다. 이는 부모가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조정과 지방수령들이 책임지고 아이들이 안정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인데 정조대왕은 아이들을 10살 때까지 책임지고 국가가 보살피도록 하였다.

이건희 회장도 1989년 삼성복지재단을 설립하여 가난한 이들을 지원하였다. 우선 저소득층 가정의 경우 부모가 일을 나간 뒤에도 아이들을 안심하고 맞길 장소가 최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990년 1월 삼성 어린이집을 개관하였고 현재 전국적으로 33개 소의 어린이집이 운영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건희 회장은 기업은 환경을 위한 지구환경 연구소를 설립하고 삼성의료원을 건립하였으며 유산으로 1조원을 감염병 예방과 희귀질환 어린이 환자를 위하여 기부하였다.

◇ 여섯째, 조선 경제를 부흥하고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 놓다

정조대왕은 취임 후 4대 개혁과제를 선포하였는데 그 첫번째가 민산 즉 국민이 잘사는 조선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300년 이상 독점적으로 내려오던 특정 상인이 독점하던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신해통공을 발표하여 누구나 상업을 통하여 부를 이룩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는 더 나아가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여 최첨단 거중기 기술을 도입하고 토목 공사를 시행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였다. 또 '만석거’라는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지를 개량하고 화성시는 누구나 상업을 할 수 있도록 자유시장을 만들어 화성시장이 조선 3대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이후 1994년에 메모리 세계1위를 차지하고 2006년 소니를 제치고 TV 세계 1위를 달성하였으며 2011년 휴대폰 세계 1위를 달성하였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부터 2018년까지 30년 동안 삼성그룹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육성하고 매출 삼성그룹 매출 878조(87배 성장), 세전 이익 72조(359배 성장), 임직원 52만 명(5.2배)에 달하였다.

삼성전자는 2018년 영업이익 59조로 일본 전자 업체 8개를 합친 영업이익 27조의 2배를 넘어섰고 세계 기업 시가 총액 12위로 올라섰다. 삼성 브랜드 가치는 현재 세계 5위이다.

◇ 일곱째, 무예로 체력을 단련하고 스포츠로 국위를 선양하다

정조대왕은 세자 시절부터 무예를 닦기에 힘을 써서 무인 군주라고 불릴 정도로 무술과 병법을 연마하였다. 특히 활에 대하여는 신궁이라고 불릴 백발 백중의 실력을 보였고 병학통이라는 진법서를 발간할 정도로 뛰어난 대학자이면서도 엄청난 무예의 고수였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18기 무예’도 정조대왕이 정립하였다. 이건희 회장도 고교시절 레슬링 선수를 하면서 운동을 좋아 하였고 특히 스포츠 외교로서 IOC 위원을 21년간 (1996-2017)역임하며 한국 스포츠 발전에 큰 공헌을 세웠다.

특히 이건희 회장은 삼성스포츠단 대표인 박성인 대표(1997-2011)와 사위인 김재열 대표(2011-2016)를 빙상경기 회장으로 맡겨서 김연아, 이상화 등 숱한 스타를 배출하였다. 또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큰 공을 세우고 2000년대 이후 삼성 그룹 스포츠 전성기를 가져왔다.

◇ 여덟번째, 문화 예술의 꽃을 피우다

정조대왕 시절에는 조선 후기 문화 예술에서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정조 대왕은 주자소를 설치하여 약 100만의 활자를 주조하고 규장각에서도 다수의 도서를 출판하였다.

특히 정조시대에 회화에서는 중국과 다른 조선 진경문화가 생겨나서 김홍도라고 하는 조선 최고의 화가가 탄생하였고 혜원 신윤복 김득신 등이 풍속화로 꽃을 피웠다. 또 겸재 정선의 전통을 이어받아 김석신 강세황 이인문 등의 진경 산수화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회장의 예술품 특히 미술품에 대한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병철 회장이 개관한 호암 미술관에 이어 2004년에 세계적인 수준의 리움 미술관이 개관하였다. 특히 회장의 미술에 대한 열정은 사후에 진면목이 드러났다.

사후에 국가에 기증한 미술품이 무려 23,000점이다. 국보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비롯한 고려 조선시대의 작품과 김환기, 나혜석, 박수근 등 근현대 화가 작품, 모네, 미로, 달리 등의 세계적인 거장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문화재와 미술품 기증이다.

◇ 맺음말

정조대왕과 이건희 회장은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한 지도자였다.

정조대왕은 늘 백성은 물이고 군주는 배(군주민수)라고 생각했다. 백성이 화가나면 배를 뒤집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민본사상이다. 110회 이상 정약용 등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탐관오리를 척결하였다.

수원 화성 행차시에 백성의 고충을 들어주는 격쟁을 활발히 시행하였고 1798년 말년에는 자호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 하여 하늘에 떠있는 달은 세도가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실개천 같은 농민들도 비춘다며 위민사상을 실천하였다.

이건희 회장도 늘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선대 이병철 회장의 사업보국 이념을 더 철저히 시행하였다. 2015년 이건희 회장이 북경에서 발언한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라는 발언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평소에 과묵했던 이건희 회장도 2011년 7월 7일 남아연방 더반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발표되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 국위에 선양되었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국민이 없었다면 삼성이 어떻게 성장했겠느냐'는 말에도 나타난 그의 국민 사랑은 사후 유산 기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건희 회장 2주기에 조선 후기에 가장 존경받는 개혁 군주 정조와 대한민국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은 초일류 기업인 이건희 회장을 같은 반열에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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