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종합기술원 연구원, 실리콘밸리 지사장등 경력
-美서 인터넷 시대 기업 태동 목격, 벤처캐피탈 활동도
-송 대표 "베트남 진출 韓 스타트업 돕는 게 나의 보람"
-韓 창업진흥원 통해 창업기업 글로벌 진출 멘토 역할도

[VSV캐피탈 송승구 대표가 무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무역경제신문]
[VSV캐피탈 송승구 대표가 무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무역경제신문]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느 날 베트남을 갔다. 버스를 탔는데 차장이 차비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70년대 풍경을 베트남에서 접하니 무척 반가웠다. 아이가 어른에게 물건을 건넬 때 두손으로 공손하게 주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유학을 가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그때가 76년이었다. 그러다 93년에 취업을 하면서 한국에 돌아왔다. 20년 가까이 고국을 떠나있다보니 우리나라가 중진국을 거쳐 선진국으로 향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지 못했다. 마치 영화를 보다 잠깐 잠이 들어 장면을 놓친 것과 같았다. 그런데 잊고 있었던 모습을 베트남에서 만났다. 가슴이 뻥 뚤리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실리콘밸리(VSV)캐피탈 송승구 대표(사진)는 '제2의 인생'을 베트남에서 보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송승구 대표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을 들어가야한다는 신념을 갖고 이사짐을 싸 베트남 하노이로 갔다. 그때가 2015년이다.   
 
"회사에서 연구원과 주재원 생활만 했지 실제 사업부서는 경험하질 못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본 적도 없었다. 베트남에서 직접 사업해보자고 마음을 먹고 돈도 투자했다. 하지만 베트남을 잘 모르고 접근했다. 오판을 한 것이다."

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모두 나온 송 대표는 93년 당시 삼성종합기술원에 입사했다. 캐나다에서 무공해자동차 연구를 하던 그에게 90년대 초 자동차사업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삼성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하지만 삼성의 자동차 사업이 드롭되면서 그는 갑자기 회사의 실리콘밸리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외국물을 좀 먹고 영어좀 하는 사람을 찾다보니 사내에서 그가 낙점된 것이다.

"당시 손욱 회장께서 내가 미국으로 가기 직전 점심을 사주시면서 두가지만 신경쓰라고 당부하셨다. 첫번째는 1년에 한번이라도 꼭 훌륭한 인재를 뽑으라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인터넷에 근본이 되는 기술들은 지난 20~30년 사이 이미 시작이 됐는데 향후 20~30년은 분명히 산업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그 기술들을 찾으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손 회장의 당부는 송 대표에겐 큰 울림이 됐다. 송 대표는 실리콘밸리에서 7년간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 세상이 빠르게 바뀌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지켜봤다. 다가올 인터넷 세상을 주무르는 수 많은 기업들의 태동도 직간접적으로 지켜봤다. 이들 기업에 투자하려는 벤처캐피탈(VC)을 비롯해 선진 금융시스템도 그때 접했다. 그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선 회사에서 신산업, 재생에너지, 바이오, 헬스 등 떠오르는 신기술 분야의 기업과 인재를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VC업무도 접했다. 

하지만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하며 송 대표가 회사에서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그후 그는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다시 실리콘밸리로 갔다. 거기서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를 동원해 벤처캐피탈리스트의 길을 걸었다.

[송승구 대표가 무역경제신문 이금룡 발행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무역경제신문]
[송승구 대표가 무역경제신문 이금룡 발행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무역경제신문]

그러다 어느날 그의 귀에 베트남이란 나라가 들렸다. 송 대표는 무엇에 끌리듯이 아내와 함께 베트남으로 떠났다.
 
"초기에 사업을 하다 두 번을 크게 말아먹었다(쓴웃음). 한국으로 의료관광을 많이 가는데 아예 한국인 의사를 베트남으로 데려와 병원을 차렸다. 그런데 내가 병원일을 잘 모르다보니 문제가 발생해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문제의 본질이 다 똑같다는 것은 짧은 생각이었다. 처절하게 망했다."
 
큰 마음먹고 간 베트남은 그렇게 쓴 맛을 가장 먼저 안겨줬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었다.
 
"베트남 친구가 그러더라. 대만, 일본, 싱가포르 등 다른 나라 사람들은 베트남와서 다 성공하는데 왜 한국사람은 실패를 많이 하는지 아느냐고. 그 친구가 말하길 한국 사람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베트남에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전정신이 강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무모하다는 것이다. 꼭 내 이야기 같더라. 내가 자살골을 넣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도 잃고 마음까지 상처받은 그는 그냥 돌아올 수 없어 베트남에서 그렇게 2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특히 베트남에서 국제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그의 아내가 큰 힘이 됐다.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어려울 때 집사람이 바가지를 긁기보다(웃음) 나를 많이 격려해주고 배려해줬다. 내가 베트남에서 재기하고 활동하는데 큰 동력원이 됐다.”
 
송 대표의 아내는 현재 BD Law라는 베트남 로펌에서 현지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들의 법률 업무를 도와주고 있다.
 
송 대표는 "다른 나라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적어도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그냥 그 나라에 살아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초기 투자비라고 생각하면 된다.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들을 이해하고 문화를 접하고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그렇게 다 (그 나라와 사람을)이해할 수 있을 때 사업을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고 전했다. 베트남에 간지 2주만에 투자를 했다 쓴 맛을 본 그의 뼈 있는 말이다.

[송승구 대표. /사진=무역경제신문]
[송승구 대표. /사진=무역경제신문]

송 대표가 쉬었다고 말한 2년은 쉬는 시간은 물론 아니었다.
 
"미국에서 내가 했던 일들이 소문 나면서 베트남에서도 이곳 저곳에서 자꾸 부르더라. 투자 행사에 참가해달라거나 아니면 투자 심사를 해달라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끔은 지식 나눔 활동도 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현재 공동대표 직함을 갖고 있는 '베트남실리콘밸리(VSV)'를 만났다.
 
"VSV 파운더들은 생각이 열린 사람들이었다. 베트남의 미래를 위해 스타트업들을 키워야한다고 틈만 나면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목소리를 전달했다. 베트남에도 미국과 같은 실리콘밸리를 만들어야한다고 하면서다. 그랬더니 정부에서 아예 너희들이 전략을 짜서 가져오라고 했다. 국책과제명이 'VSV'였다. 그리고 그 중심엔 VC가 있어야하고 엑셀러레이터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 VSV가 지금은 내가 몸담고 있는 법인명이 됐다."
 
송 대표는 VSV측으로부터 정식 멤버 제안을 받은 후 한술 더 떠서 아예 자신도 투자금을 대고 파트너로 일하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지금은 제너럴 파트너(General Partner)로 VSV캐피탈에서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송충이가 떡잎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후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펀드 결성을 주도했다. 미국에서 VC 역할을 하며 투자금을 모을 때보다 서너배는 힘이 들었다. 투자자들이 생각하는 미국과 베트남의 온도차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베트남에 대해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거의 비슷했다. 돈이 들어가는 것은 쉬운데 나올 땐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 가장 많았다. 투자 대상은 많으냐, 엑시트(exit)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도 많았다. 나도 그에 대한 답이 없었다. '최대한 노력해보겠다'고 대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금룡 무역경제신문 발행인(왼쪽)과 송승구 대표가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무역경제신문]
[이금룡 무역경제신문 발행인(왼쪽)과 송승구 대표가 대화를 하고 있다. /사진=무역경제신문]

그렇게 1호 펀드에는 230만 달러가 모였다. 첫 펀드 결성이다보니 투자 분야는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투자한 스타트업이 베트남에서 4번째로 큰 배달앱 '로십(LOSHIP)'을 운영하고 있는 로지(Lozi)다. 로지는 로십을 통해서 하노이, 호치민 등 베트남 4대 도시에서 음식, 식료품, 세탁물, 꽃 등의 배달서비스를 하고 있다. 
 
송 대표는 "로지는 CEO를 보고 투자를 했다. 로지 CEO는 베트남 사람이지만 한국의 카이스트(KAIST)에서 유학까지 했던 인물이다. 시장성과 성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고 투자 배경을 설명했다.
 
송 대표는 한국의 창업진흥원에 하고 있는 스타트업 글로벌 진출사업 멘토 역할도 하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하려고 하는 한국의 스타트업을 도와주는 것이 나의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로 베트남 생활이 7년 밖엔 되질 않았지만 새로 현지에 진출하려는 사람들에게는 (7년이)최신 버전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난 직접 사업을 했다 실패를 한 경험도 있지 않느냐.(웃음)."
 
그가 7년간의 베트남 생활 동안 가장 많이 되내인 사자성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다.  
 
"베트남에서 한국 사람이 돈만 벌어가면 가만히 놔두겠느냐. 베트남 문화를 이해하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또 베트남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들과 공생할 수 있어야한다. 남북으로 긴 베트남은 하노이와 호치민이 굉장히 멀다. 두 도시의 성격도 달라 사업에 따라 선택지도 달라야 한다. 규제를 만들고 도장을 찍는 도시는 하노이다. 

소비재는 호치민이 어울린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인건비가 이들 도시보다 저렴한 다낭이 유리하다. 베트남이라고 다 같은 베트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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