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규모 한국 난 수출 전진기지 '코러스 오키드' 20년사
방법 없으면 길 개척해 미국진출 모색 "도전정신과 실천력이 해답"
코리아 가든센터로 한국 난 미국진출 판로 확대와 청년실업 해결하고파

[K글로벌타임스] 미국에 대규모 한국 화훼농장이 운영 중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국민은 얼마 없을 것이다. 20년 전, 그야말로 ‘도전정신’과 ‘실천력’ 하나로 한국 난 시장의 불모지였던 미국진출에 도전한 입지적인 인물이 있다. 황병구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장이다. 언어도, 문화도, 기후도 다른 낯선 타지로 혈혈단신 건너가 한국 호접난 시장의 대미수출을 완성시킨 황 회장은 폴로리다 올랜도에서 호접난 농장 ‘코러스 오키드(Korus Orchid)’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뷰 하고 있는 황병구 회장. [사진: K글로벌타임스]
인터뷰 하고 있는 황병구 회장. [사진: K글로벌타임스]

 

코러스 오키드 농장. [사진: 코러스 오키드]
코러스 오키드 농장. [사진: 코러스 오키드]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 회장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만한 각오도 준비되어 있었다. 수차례 정부기관과 지자체 문을 두드려 호접난 미국 수출 전진기지를 위한 지원사업을 손수 마련했고, 수출입에 따른 관련 법규도 제정하기 위해 수년을 고군분투했다. 방법이 없으면 그 길을 개척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황 회장은 이제 한국 화훼농가의 ‘한류’를 위해 미국 전역에 ‘코리아 가든센터’ 설립을 계획하고 있으며, 한국의 지속적인 사회문제로 손꼽히는 청년실업 문제도 해결하고자 한다. 이처럼 그의 끊임없는 도전은 개인의 야망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다 같이 함께 살고자 하는 ‘우리’를 위함이다.

 

Q. 화훼 분야로 사업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제가 3살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들만 4명이었는데 제가 셋째였죠. 어머니께서 보따리 장사를 하시면서 생계를 유지하셨습니다. 그러다 실업계 고등학교 1학년 때 형편이 안 되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마을 농업 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농촌지도사와 밀접 관계를 맺으며 식물 표본도 제작하고 그랬죠. 그때 과제를 발표하면서 대중 앞에서 발표하는 일에도 익숙해져 갔습니다.

스물두 살부터는 마을 생활 지도자로 발탁되어 더 세밀하게 농업의 생태계를 알아 갔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마을 면장님이 긍정적으로 봐주셔서 새마을금고 회계도 맡으며 자산 관리 역량을 키웠습니다.

1981년에 제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 ‘아, 나는 이제 혼자의 몸이 아니니 무언가에 도전해 결단을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당시 공업 산업이 붐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공업도시면 농산물을 많이 소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울산으로 향했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니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울산의 농촌지도자를 찾아가 제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움을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도움을 받아 좋은 땅을 소개받았죠. 소위 ‘별 보고 출근해 별 보고 퇴근한다’는 말이 당시 제 상황과 딱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딸기로 농업을 시작했습니다.

 

Q. 그렇다면 화훼, 특히 난 농장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신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당시에 ‘조경회’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제가 딸기 농장을 하던 옆에서 조경회 회장님이 화훼 농장을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무척 열심히 하니까 그 모습이 마음에 드셨던지 딸기 농장이 아니라 화훼 농장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울산에 화훼 농가가 몇 없었거든요. 물론 그간 해오던 일과 달라서 고민을 했지만, 화훼 시장을 들여다보니 잠재력이 상당하다고 판단하고 화훼로 방향을 변경했습니다.

시작은 관엽 식물이었습니다. 미니 장미가 한국에 소개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라 수익성이 좋았죠. 그런데 제가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린 겁니다. 당시 언론에도 소개되면서 아침 꼭두새벽마다 거래처가 저희 농장에 줄을 지어 대기하는 광경이 일상이었습니다.

농장이 성장하면서 여기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더욱 성장시켜야겠다는 판단에 서양난 시장을 알아보았고, 호접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길이 여기에 있다는 일념으로 온 힘을 다해 호접난 농장을 키우기 시작했죠.

 

Q. 현재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코러스 오키드’ 농장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처음부터 미국 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신 걸까요?

5년 정도 울산에서 호접난 농장을 운영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내수 시장만으로는 성장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었죠. 이를 돌파하기 위해 해외진출을 알아보았고, 우리나라에서 최초 일본으로 호접난 완제품을 수출했습니다. 그런데 검역이 정말 까다롭다는 단점이 있더군요. 그래서 중국으로 진출했는데, 춘절 시즌이 아니고는 수출량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더군요. 그래서 농림부에 연락해 전 세계 난 시장을 조사한 자료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농림부 장관이셨던 분이 미국의 난 시장을 조사한 책 한 권을 보내주셨는데, 그걸 5번 정독했습니다. ‘아, 미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Q. 혈혈단신으로 미국시장에 진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00년이었을 거예요. 영어는 물론이거니와 미국에 아는 인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미국시장으로 진출한 국내 난 농장도 없었고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인 셈이었죠. 하지만 미국시장으로의 진출이 너무나도 간절한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난 시장을 국제화시키고 싶다는 열망도 컸고요.

그래서 다시 한번 농림부에 막 부임한 장관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나라 화훼농가의 현실이 이러하니 반드시 해외진출만이 답인데, 미국 바이어를 구하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내용이었죠. 그러니 내가 미국에 수출 전진기지를 만들어 한국 난을 미국에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가 정말 장관님께 가 닿은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죠.

그로부터 2주도 채 안 되어 답신이 왔습니다. 농협에서 제게 연락해 사업계획서를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밤을 새워가며 사업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결과 약 3억원의 지원을 받게 되어 미국시장으로 진출하게 되었죠.

 

Q. 회장님의 간절함이 이뤄낸 성과인 듯합니다. 진출 과정에도 상당한 난관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농민 5명을 선발해 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사전조사를 위해 네덜란드 등 다양한 국가를 방문하며 식견도 넓혔죠. 농협에도 제가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 투자를 유치받았습니다.

그다음은 미국에 화훼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한인을 찾기 시작했어요. 모든 인맥을 총출동해 수소문했죠. 그렇게 한 분과 인연이 맞닿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국내 화훼시장의 부흥기를 위해 미국시장에 진출하려고 하는데, 현지 연평균 강수량, 최고 및 최저 온도 등 기후를 자문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한국으로 불러 제가 운영하고 있는 농장을 보여줬습니다. 서로 업무협약을 맺을 텐데, 한국 농장의 퀄리티를 그분도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좋은 농장을 운영하며 한국 난을 미국에 보낼 테니, 영업을 맡아달라는 내용으로 업무협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렇게 미국 올랜도에 협지답사 차원으로 갔습니다. 올랜도 공항에서 딱 나오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여기는 반드시 진출해야겠다.’

정부 지원금, 울산시 지원금, 농협 투자금, 그리고 우리 협동조합원들이 각각 1억원씩 투자했는데, 다른 지역의 화훼농가들이 후발주자로 미국 올랜도에 수출 전진기지를 만들겠다고 한 겁니다. 게다가 그쪽이 그간의 수출 실적이 더 높았어요.

지원금이나 투자금이 다 끊길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하우스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당장 모든 일을 손에 내려놓고 한국으로 들어와 바로 농림부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달라고 했죠. ‘우리는 이미 올랜도에 하우스를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 농가들의 사기를 다 떨어트리려고 하고 있냐. 올해 안으로 그 사업이 진행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2001년 미국시장으로 진출했습니다.

 

Q. 우리나라 스타트업이 해외시장에서 현지 금융의 도움을 받기란 참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미 20년 전에 미국 금융업계에서 도움을 받으신 성과가 있습니다.

하우스를 다 지었더니, 이번에는 경영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은행에서 대출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제가 다시금 실행력을 바탕으로 현지 금융 기업과 미국 주정부 관계자와 간담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죠. ‘왜 한국인에게는 대출을 안 해주느냐’ 하고요. 저마다 사정이 있더군요. 한 금융기업 관계자가 한국인은 대출기간보다 더 빨리 갚아 그게 문제가 된다고 했죠. 그래서 제가 반박을 했습니다. 한국인이 대출을 그만큼 잘 상환하는 뜻이 아니겠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설득했습니다.

황 회장이 한국 난의 미국진출 희로애락을 말하고 있다. [사진: K글로벌타임스]
황 회장이 한국 난의 미국진출 희로애락을 말하고 있다. [사진: K글로벌타임스]

 

Q. 미국에 진출하고 난 뒤의 어려움은 없었나요?

한국 농장에서 어느 정도 자란 호접난을 미국 농장으로 가져와 키우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난항을 겪었습니다. 화분에 심어진 채로 미국으로 가지고 올 수 없는 규제상 뿌리째로 가지고 와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운송 및 세척 과정에서 뿌리가 하는 경우가 많았죠. 한국에서 수입된 호접난의 30%가 고사하는 피해를 봤습니다.

이러면 미국 난 시장을 꽉 잡은 대만과는 승부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현지 농장을 개발해야겠더군요. 다시 발로 뛰며 애틀란타 총영사관과 한국의 지자체 지원을 받아 미국 농장을 확대했습니다. 물론 9년에 걸친 기나긴 설득 끝에 현재는 화분에 심어진 상태로 미국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Q. 가시적인 성과는 언제부터 드러났나요?

2011년부터 약 10억 달러, 20억 달러 흑자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현장을 누비며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하고 협상을 한 게 큰 도움이 되었죠. 주미대사관의 경우 외교 모임에서 우리 농장 호접란 등을 손님들에게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농축산부에서는 수출 난 검역과 위생을 도와주기도 했고요.

제가 미국에 수출 전진기지를 세운 후 다양한 지자체가 미국 전역에 수출 전진기지를 설립했지만, 살아남은 건 코러스 오키드가 유일합니다.

코러스 오키드 농장 내부. [사진: 코러스 오키드]
코러스 오키드 농장 내부. [사진: 코러스 오키드]
코러스 오키드 농장 내부. [사진: 코러스 오키드]
코러스 오키드 농장 내부. [사진: 코러스 오키드]
코러스 오키드 농장 내부. [사진: 코러스 오키드]
코러스 오키드 농장 내부. [사진: 코러스 오키드]

 

Q. 한국 난의 미국시장 진출에 입지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계십니다. 그런 만큼 책임감도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미국 전역에 ‘코리아 가든센터’를 조성하는 큰 꿈을 그리고 계시다고요.

미국 전역에 코리아 가든센터 500개를 조성해 연 1천만개의 우리나라 호접란을 미국에 수출시키고 싶습니다. 갤럭시나 아이폰도 자사 제품만 진열해놓는 홍보관이 전 세계에 있지 않습니까. 이를 한국의 호접난 시장에도 적용하려고 합니다.

서양난은 물론 동양난 등 더 많은 화훼농가들의 도움을 받아 코리아 가든센터에 재배해 식물 카페처럼 운영하고 싶어요. 현지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면서, 한국 화훼시장을 알리는 것이죠. 나아가 국산 제품들도 진열해서 보다 복합적인 공간을 꿈꾸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이 청년실업 문제가 상당히 진통이지 않습니까. 이들을 코리아 가든센터 직원으로 영입해 청년실업 문제도 해결하고 싶습니다. 조경 분야부터 시작해 다양한 분야의 청년 일자리 창출이 가능합니다.

황 회장과 이금룡 K글로벌타임스 발행인의 기념사진. [사진: K글로벌타임스]
황 회장과 이금룡 K글로벌타임스 발행인의 기념사진. [사진: K글로벌타임스]

 

Q. 향후 다른 계획이나 포부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미국 화훼시장은 USD 승인을 받으면 어느 국가든지 진출이 가능합니다. 저는 미국 화훼시장의 인프라를 오랜 기간 끝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완성했죠. 농장만 미국에 진출시키면 판매 경로는 확보된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이만큼 노력을 기울인 건 순전히 저만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화훼농가의 부흥을 위함이죠. 그 어떤 시대적 역경이 있더라도 제가 하는 화훼시장만큼은 소득을 보장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K글로벌타임스 강초희 기자] [email protected]

관련기사

저작권자 © K글로벌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